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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영화식사

[영화식사 025] 희망은 너무도 불안한 단어라서

[영화식사 025] 희망은 너무도 불안한 단어라서
ㅡ 영화 <희망의 여행>(Journey of hope, 1990)

 

 

지난 9월 해변에서 발견 된 시리아 난민 소년의 시신이 만리타국인 여기까지 충격을 준 와중에, 같은 날 또 다른 시리아 난민이 난민열차 역에서 낳은 아기의 이름은 복잡한 심경을 안겨줬다. 아기의 이름은 ‘쉼즈’(shemes), 즉 ‘희망’을 의미한다고 했다. 곁에 부모도 없이 쓸쓸히 죽어있는 3살 소년의 사진을 본 지 몇 분 되지 않아 ‘희망’이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난 아기의 소식을 접하니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졌다. 동시에 고등학생 시절 필름포럼에서 본 스위스 영화가 생각났는데, 당시 그 영화를 보고 느꼈던 ‘희망’이라는 단어의 부조리함을 이번 시리아 소년의 죽음과 아기의 출생을 통해 다시금 환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희망의 여행’(Journey of hope)이란 제목부터 이미 반어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스위스로 가기 위해 어린 아들과 여정을 떠난 부부는 예상치 못한 험난한 날씨와 지형으로 인해 결국 스위스 국경 앞에서 아들을 잃고 만다.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뒤, 스위스엔 대체 무엇 때문에 왔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아버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답한다. “희망.” 터키를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갖고 있었을 어렴풋한 희망이 눈발에 찢겨지고 아들의 시체로 변해 돌아왔다. 슬프게도 실화다.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정확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대답하는 장면은 유일하게 또렷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희망”이라는 단어와 달리 그 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공허해서였을까. 그래서 9월에 접한 시리아 난민 아기의 이름을 보고 내심 ‘희망’이란, 너무도 불안한 단어라는 생각을 했다.

 

국내 언론은 시리아 난민의 처절한 국경 넘기를 보도하는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난민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기도 했다. 지금도 포털사이트에 ‘시리아 난민’을 쳐보면 자동검색어로 수용 반대 혹은 찬성이 뜬다. 유럽이 시리아 난민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며 소소한 찬반 토론이라도 있었나 보다. 불필요한 논의라는 말도 있지만 난민을 신청하기보다 신청 받는 입장인 나라에서 나올 만한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찬반 여부를 떠나 표류하는 난민을 두고 경제적 가치와 사회문화적 영향을 계산해야 하는 모습들을 보면 역시 ‘희망’은 얼마나 불안한 단어인지. 마찬가지로 인류애나 관용 같은 말들은 감상적인 대의에 불과하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어느 쪽에도 선뜻 말을 얹지 못하는 나는 그저 ‘희망’이라는, 불안하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원동력이 되는 단어 앞에서 무기력해질 뿐이다. 최근 터키의 총선에서 보수 성향의 집권 정의개발당(AKP)이 재선에 성공했다. 가장 큰 요인은 최근 몇 개월간의 연쇄테러로 인한 안보 불안이지만 일각에선 늘어난 시리아 난민 수용에 대한 공포감도 보수당 집권에 일조를 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영화 <희망의 여행>에서 스위스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부부는 터키인이다.

 

 

 

 

<희망의 여행> Journey of hope, 1990

자비에 콜러 감독의 영화. 1991년 6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