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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영화식사

[ 영화식사 022 ]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 영화식사 022 ]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ㅡ 영화 <라스트 나잇> (Last night, 2010)

 

남자는 다른 여자와, 여자는 옛 애인과 하룻밤을 보낸다. 만약 불륜에도 급이 있다면 육체적 불륜과 정신적 불륜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쁠까. 언젠가 남자친구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의외로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남자친구의 말에 따르면 직접 해보기 전까진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한다. 남자친구는 불륜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는 일 자체를 거부했다. 실체적인 행동, 즉 육체적 결합이 아닌 이상 정신적 불륜이란 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라스트 나잇>을 본 뒤 종종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의문이 남자친구의 대답으로 확실하게 거둬지진 못했다.

 



결혼이라는 제도권으로서의 조건이 아니더라도, 연인이란 서로 사랑을 나누고 또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관계의 전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설레는 감정의 외피는 벗겨지고 견고한 신뢰가 연인 사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데, 엄밀히 말해 신뢰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조건에 가깝다. 다시 말해 연인의 신뢰란 그 관계를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줄 뿐 반드시 서로가 사랑하고 있다는 필수조건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라스트 나잇>에서 조안나(키이라 나이틀리)는 남편 마이클(샘 워싱턴)과 그의 직장 동료인 로라(에바 멘데스) 사이의 묘한 기류를 의심하고 신경질을 낸다. 남편의 직장 동료에게 예민해질 만큼 질투했던 조안나가 다음날 남편이 출장 간 사이 옛 연인을 만나 흔들리는 모습은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연인이 갖는 신뢰와 사랑을 끌어와 보면, 조안나와 마이클이 공유하는 감정은 지금의 (부부로서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겠다는 신뢰가 주된 바탕이다. 조안나가 마이클과 로라를 예민하게 받아들인 이유도 이러한 신뢰관계가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발로일 것이다. 그래서 마이클과 싸운 다음날 아침 조안나는 마이클의 짐 속에 “내가 과민 반응한 것 같아. 난 알아. 당신을 알아. 사랑해.”라고 적은 쪽지를 넣어둔다. “난 알아. 당신을 알아.”라는 말은 마이클에 대한 조안나의 감정이 “당신을 안다”는 확신, 즉 사랑보다 믿음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마이클은 어떤가. 직장 동료인 로라와 출장을 간 마이클은 그날 밤 결국 육체적 외도를 저지르고 만다. 오랜 시간 옛 연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조안나에 비하면 마이클의 외도는 충동적인 면이 강하다. 로라와 하룻밤을 보낸 마이클은 다음날 짐에서 옷을 꺼내던 중 조안나가 몰래 넣어뒀던 쪽지를 발견하고, 죄책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미팅을 취소한 뒤 급히 집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 이러한 마이클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복잡한 조안나의 감정선보다 예측이 가능한데, 외도의 충동적인 과정과 그 후 아내가 보여준 신뢰로 인한 각성이 여타 영화들처럼 단순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이클이 좀 더 실체적이고 직접적인 외도를 저지름으로써 아내와의 신뢰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크게 드러난다.

 



하지만 마이클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조안나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오히려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남편에게 그녀는 “왜 이렇게 빨리 왔는데?”라며 가벼운 짜증을 표한다. 다른 여자와 육체적으로 외도를 범한 마이클이 잘못을 깨닫고 얼른 조안나와의 신뢰 관계로 돌아온 반면, 조안나는 옛 연인에 대한 미련, 그리움, 그 외 복합적인 감상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 마지막 장면 때문에 나는 여전히 불륜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고 저울질 해보는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 실체적인 불륜을 저지른 건 마이클인데도 이 둘의 사이가 회복될 수 있는 실마리는 조안나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백가지를 넘는 사랑의 모습에서 신뢰로 엮인 관계도 연인이 사랑하는 하나의 형태가 될 수 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조안나와 마이클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기미는 보이지 않기에, 어젯밤Last night의 일은 비밀로 간직한 채 둘은 여전히 서로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현 듯 마음을 쓸쓸하게 만드는 정체는 무엇인가. 마이클과 달리 조안나의 마음은 실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스트 나잇> (Last night, 2010)

마시 태지딘 감독의 영화로, 뉴욕 상류층의 삶을 사는 부부가 다른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네 명의 배우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