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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영화식사

[ 영화식사 020 ] 그 사람은 괜찮은지 말해 줘

[ 영화식사 020 ] 그 사람은 괜찮은지 말해 줘
ㅡ영화 <39계단> (The 39steps, 1935)

 

영화를 볼 때 종종 한 눈을 판다.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잠깐 스치는 조연보다 못한 역할에 감정을 이입하는 습관이다. 괴수영화에서 단지 몇 초만에 괴수에게 죽는 무장요원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로마의 휴일>(1953)에서 앤 공주(오드리 햅번)와 잠깐 춤을 춘 이발사에게 관심을 갖는 식이다. 주인공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 행복하게 영화 뒤로 퇴장하겠지만, 이런 역할들은 대개 한 두 컷에서만 존재할 뿐 완결성이 없는 캐릭터다.

관객의 주체성을 논할 것도 없이 영화 속 공간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내가 주인공일 리 없다는 일종의 염세적인 확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기 보다는 그 주변부를 맴도는 평범한 누군가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종종 영화를 볼 때 분명 주인공이 기사회생하는 장면인데도 그로 인해 희비가 교차하는 조연의 상황에 덩달아 우울해진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대표작 중 하나인 <39계단>은 우연히 수수께끼의 여성을 알게 된 해니(로버트 도나트)가 그로 인해 목숨을 위협 받고 쫓기는 정통 스릴러물이다. 아니, 정통 스릴러물이라기 보단 히치콕이 창조한 새로운 스타일이 이후 많은 스릴러물의 참고서가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도저히 그 시대에 탄생했다곤 믿기지 않는 연출과 서사의 완결성이 지금 봐도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 없이 나를 우울하게 하는 빈틈이 존재한다.

지명수배 된 해니는 쫓기던 와중에 한 시골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농가의 주인은 해니의 도시적인 차림새와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의심하지만, 그 아내는 거칠고 권위적인 남편과 달리 정중한 해니에게 호감을 갖는다. 해니를 잡으러 온 요원들이 농가까지 오자 아내는 해니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해니가 뒷문으로 도망친 뒤 이를 눈치 챈 남편은 아내의 뺨을 때리고, 남편의 손찌검에 무너지며 그녀는 장면전환과 함께 영원히 극에서 퇴장한다.

 

 

영화 <39계단>의 스텝롤이 올라갈 때까지 내가 기다리던 건 해니가 모든 오해에서 벗어나 음모의 전말을 밝히는 장면이 아니었다. 물론 ‘39계단’이라는 암호의 장치와 수미상관식 플롯은 무릎을 치게 만들지만, 정말 궁금했던 이야기는 해니가 아니라 그 농부 아내의 뒷일이었다. 해니가 농가에서 도망친 후 그 아내는 어떻게 됐을까. 도시를 동경하며 해니를 도와준 그녀는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빠져나왔을까. 아니면 여전히 권위에 눌려 순종하며 지루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까. 혹시 해코지라도 당한 건 아닌지. 퇴장할 때 상황이 워낙 최악이었으니 걱정이 되는데, 놀랍게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고도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 이런 캐릭터가 그렇듯 그녀는 관객이 궁금한 이야기의 본론이 아니다. 영화가 부여한 그녀의 인생에 좀 더 긴 희로애락이 존재했다면 애초에 주인공이 되었지, 이름도 없는 ‘농부 아내’가 아니었다. 이런 캐릭터를 만나면 영화가 좋은 결말로 끝나도 한동안 찝찝하다. 그래도 여전히 영화를 볼 때 한눈을 파는 습관을 고칠 수 없다. 아마 나 역시 주인공이 아니라 그 주변을 맴돌 뿐인 평범한 누군가 중 한 명일 테니.

 

<39계단>(The 39 Steps, 1935)

감독 : 알프레드 히치콕
주연 : 로버트 도나트, 매들린 캐롤 등

1935년 앨프레드 히치콕이 영국에서 활동할 때 연출한 흑백영화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 스파이소설의 선구자로 꼽히는 존 버컨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찰스 버넷(Charles Bennett) 등이 각색하였으며, 로버트 도냇, 마들렌 캐럴(Madeleine Carroll) 등이 출연하였다. 상영시간은 86분이다.

(중략)

평범한 사람이 범죄 사건에 연루되어 누명을 쓴 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진범을 추적하는 모험을 펼치는 내용은 히치콕이 즐겨 다룬 테마로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나는 고백한다》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영화는 고전적인 시청각적 몽타주 수법 등을 통한 빠른 장면 전환,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 긴장과 유머의 적절한 조절, 결말의 극적인 반전 등으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히치콕이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39계단 [The 39 Steps, ─三十九階段]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