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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영화식사

[ 영화식사 026 ] 이토록 생산적인 열정이라니

[영화식사 026] 이토록 생산적인 열정이라니
ㅡ영화 <마션>The Martion, 2015

 

자기소개서에서 지원동기 다음으로 자주 접한 질문은 “살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임했던 경험이 있습니까?”다. 깜박이는 마우스 커서만 멍하니 쳐다보게 되는 지원동기나 포부 같은 항목보단 덜 까다롭다. 기계적인 손짓으로 어딘가에 정리해 둔 ‘열정적인 경험’들을 끌고 와 요리조리 대입시켜 본다. 학부시절 단편영화를 찍은 경험, 인턴을 한 경험, 웹진을 운영한 경험 등등을 적당히 버무린다. 이것들을 정말 열정적인 마음으로 해냈는진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 단지 인사담당자에게 보여주기에 썩 괜찮은 것들을 추려봤을 뿐이다. 만약 부끄러움을 걷어내고 좀 더 솔직해진다면 내가 살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임했던 일은 최근 슬램덩크와 명탐정 코난 전권을 밤새 읽은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만화책을 열심히 봤다고 하느니 커피 전문점에서 했던 아르바이트를 쓰는 편이 낫다. 여기에 “제품의 구매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에서”…“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파악하여”…“매출 향상에 몇 프로 기여했으며”…등의 설명이 추가된다면 그럴 듯한 ‘열정적인 경험’ 완성이다. 물론 모든 업무는 전문성과 사회성을 요하므로 자기소개서 역시 전략적으로 쓰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면 굳이 열정 운운할 이유는 뭔가. 열정적으로 원해야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은 피차 서로가 알고 있는데.

 

다양한 분야의 덕후들이 능력치를 뽐내는 자리인 MBC 예능 <능력자들>은 기존에 있던 비슷한 프로그램과는 다른 노선을 표방한다. 평범하지 않으면 기행 취급하거나 엽기적으로 조명하던 <스타킹> 혹은 <화성인 바이러스>와는 달리, 덕후의 취향을 존중하고 최대한 고무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고정 엠씨 중 몇 명이 덕후의 능력을 옹호하는 ‘덕후맘’ 제도가 한 예다. 온갖 시중 라면의 면 굵기부터 건더기까지 세세하게 구분해내는 라면 덕후의 분석력은 비록 자기소개서엔 쓰지 못할 능력이지만, <능력자들>에선 충분히 고차원적인 열정이 된다. 가장 좋은 덕후는 생업과는 분리된 취향을 가진 덕후고, 개인적으로 이런 덕후들의 출연이야말로 여타 프로그램과는 다른 <능력자들>만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종이로 사람만한 로봇을 만들거나 사극배우의 얼굴만 봐도 어떤 드라마의 어떤 역할인지 맞추는 덕후들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님에도 이들은 나름의 열정과 전문성을 갖고 ‘덕질’에 임한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지?”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있니?”라는 질문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덕후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우주에서 죽을 가능성을 얘기하던 감독이 우주에서 살아남는 발상을 유쾌하게 그린 영화 <마션>(2015)에서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구조대가 올 때까지 생존하기 위해 본인이 가진 온갖 지식을 총동원한다. 리들리 스콧의 전작 <프로메테우스>(2012)에서 지질학자, 고고학자 등 전문분야의 사람들이 외계생물에게 속수무책으로 학살되던 것에 반해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인 마크 와트니의 전문지식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천재일우로 바꿀 유일한 수단이다. 영화가 개봉한 뒤 관객들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문과는 가만히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로, 마크 와트니는 마치 연금술사처럼(문과생의 눈엔 이렇게 보일 뿐이다)산소와 물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적극적으로 생존한다. 마치 서부 개척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의 낙천적인 활력은 마크 와트니가 가진 능력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설정에서 나온다. 물론 마크 와트니가 생물학을 배울 때 설마 화성에서 감자를 키울 줄 예상이나 했겠냐만, 그럼에도 위기상황에서 그가 생산적인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인물이란 점이 영화의 유쾌한 상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검열된 열정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바라본 마크 와트니의 모습이 차라리 더 즐거워 보이는 이유다.

 

 

 

 

 

<마션> The Martion, 2015

주연 : 맷 데이먼, 제시카 차스테인 외

2011년 출간한 앤디 위어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들리 스콧의 SF영화. 화성인을 의미하는 '마션'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홀로 화성에 고립된 탐사대원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으며 생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연을 맡은 맷 데이먼은 73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감독 리들리 스콧은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