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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영화식사

[영화식사 029] 내 눈물은 깨끗한 사람들을 향해

[영화식사 029] 내 눈물은 깨끗한 사람들을 향해

ㅡ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

 

이재용 감독의 영화를 보고 크게 감명 받은 적은 없다. 오히려 나처럼 타인의 꼬투리만 잘 잡고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에겐 이재용 감독의 영화 속 ‘남자가 바라본 여자’가 어느 정도 불편한 지점으로 자리해왔다. 그럼에도 이번에도 그의 영화를 본 이유는 그의 전작을 봤던 동기와 비슷하다. 여배우들이 겪는 실제 인간사회는 어떤 모양일까. 촬영 뒤편에서 이뤄지는 관계자들의 관계는 어떨까. 선천성 희귀병을 앓는 아이와 부모의 인생은 어떨까. 물론 그가 다루는 소재들이 전부 하이퍼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여배우들>만 해도 거기서 배우들은 어디까지나 관객이 예상 가능한 리얼리티를 연기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 번은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그 궁금증, 달리 말해 관객의 관음적인 부분을 매번 기가 막히게 캐치해내는 이재용 감독에게 나는 이번에도 백기를 들었다. <죽여주는 여자>, ‘박카스 할머니’의 이야기라니. 이 영화를 통해 내가 무슨 사회의 부조리를 목도하고 참담해하며 혀를 끌끌 차고 싶은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이 영화가 또 한 번 내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여주는 여자>의 내용은 이렇다. 종로 탑골공원 일대에서 박카스로 접근하며 성노동을 하는 소영(윤여정)은 어느 날 한때 자신의 ‘고객’이었던 노인 세비로송(박규채)과 재회한다. 몇 년 만에 만난 세비로송은 예전의 그 깔끔하고 멋쟁이이던 모습은 간 데 없고 중풍으로 하루하루를 누워서 보내고 있었다. 대소변을 보는 일조차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할 수 없고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내색 못하고 삭혀야 하는 그는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 부탁한다. 죽는 것조차 더 이상 스스로 할 수 없기에 내린 결정이다. 이 일을 계기로 소영은 그 후에 정말로 죽고 싶은 노인들을 돕게 된다.

 

반신불수가 아니더라도 세상살이에 기력이 없고 병들고 무거운 몸을 지속하기도 힘겨운 노인빈곤층의 삶은 결코 낭만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극중 치매를 앓는 종수(조상건)가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니”란 말처럼. 나는 그 말이 어쩌면 몇 십 년 후 내가 할 수도 있을 말인 것 같았고 어쩌면 내 부모가 할 수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공감은 곧 눈물의 원천이건만 어쩐 일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왜일까. 나는 인생의 공허를 실감하고 그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토로하는 노인들을 보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성매매한 노인들’, 그리고 소영은 ‘성을 파는 여자’. 이 영화가 그런 자들의 빈한한 말년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빠르게 식어갔다. 무엇을 동정해야 하고 연민해야 하는가? 애초에 성노동자와 구매자의 저런 관계가 현실에서 가능한가. 한때 구매자였던 재우(전무송)가 배달을 하다가 우연히 소영을 만나 꽃 한 송이를 건네는 장면도 내겐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소영이 성 구매를 제안하자마자 안색이 돌변하며 “몸 파는 년 아냐, 이거”같은 거친 말을 쏟는 노인보다, 성 구매자인 노인을 더 안쓰럽고 다정하게 그려내는 시선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다큐멘터리를 찍는 대학생과의 인터뷰에서 소영이 “폐지 줍는 건 죽기보다 하기 싫더라고”라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속으로 ‘차라리 폐지를 줍지…’란 생각을 했다. 불법인 성노동보다 폐지를 주워 파는 일이 차라리 더 떳떳한 일이니까. 이미 성을 매개로 노동하는 그녀가 대체 무슨 자존심이 남아서 폐지 줍는 일을 꺼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 내가 <죽여주는 여자>에게 보낸 냉담한 시선은 아마 이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젊었을 때 입양 보낸 자식이 생각나서 코피노 아이를 데려온 것도 표면적으론 납치, 유괴가 된다. 죽고 싶어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한 노인의 마지막 밤을 지켜준 일도 표면적으론 자살방조가 될 것이며, 소영의 마지막 이름은 영화에서 그랬듯 ‘무연고’가 되어 어느 퀴퀴한 창고 한 구석을 차지할 것이다. 그 대학생이 대한민국 노인 빈곤율 어쩌구하며 다큐멘터리로 담아내려던 ‘어느 박카스 할머니의 이야기’와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방식은 얼마나 다른가? 나름대로 자신의 철칙을 지키고 뭔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살아가려던 소영이 무연고 시신이 되었을 때, 그 순간에도 ‘깨끗한’ 사람들만을 향해 흘리려던 내 눈물은 얼마나 비겁하고 위선적인가.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만 눈물 흘리는 내가 <죽여주는 여자>에 나오는 소영과 노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지. <아무르> 속 노부부의 희생과 사랑엔 두 볼이 젖도록 울면서 성 노동을 할 때 가장 먼저 향초를 켜는 소영 나름의 의식엔 아무 감흥이 없다. 나같은 사람들이 그대로 노인이 되면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어떤 선택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존엄과 자존심까지 박탈해버리는 나 같은 사람들의 세상. 그렇게 상상하니 정말 끔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