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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Text road

[일본소설]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79-903]

저자
무라카미 류 지음
출판사
(도서출판)작가정신 | 199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99.04.20 / 초판 1쇄 [크기] 15.5 cm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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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일이다. 꽃다운 10대답지 않게 이때부터 덕후세계(...)에 빠져있던 나는 어느날 친구가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했다며 가져온 금서를 읽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다.(이 책은 90년대까진 우리나라에 수입 금지도서였다)

당시 그 책을 읽은 내 반응은 "뭐야 무서워"였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도 기억나는 건 언더그라운드에서 마약하고 술마시고 토하고 노는 젊은이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작가의 철학과 심오한 메시지가 있었겠지만(있으리라 믿지만)그때 이후 다시 그 책을 찾아본 기억이 없다. 덕후였지만 그래도 그땐 나름 순수문학에 빠져있어서 신경숙, 박완서, 아사다 지로 등의 소설들을 읽고 있던 나에게, 무라카미 류의 멘탈어택은 정말 호된 충격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새 '69', '마이퍼니발렌타인', '마스크클럽(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교코', '코인로커 베이비스' 등 무라카미 류의 책들을 섭렵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 이 사람 참 하드보일드하게 살았네"하고 생각한다. 물론 '69'를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픽션이지만 섹스와 마약, 마이너리티를 묘사하는 그의 글은 자전적인 면도 없잖아 있다. 실제로 그도 그렇게 밝히기도 했고.  아무튼 작품들을 읽다보면 그가 여자와 '성'에 대해선 기가 막히게 매니아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무라카미 류가 쓴 요리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둘 다 무라카미 류가 탐닉하기 즐겨하는 대상인데, 하여튼 오감에 관련된 거라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구나 싶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맛에 대해 매우 까탈스럽게 대응하는데, 세계미식가협회의 임원이기도 하니 그가 이 책에 쓴 요리들의 맛이 대략 어떤지 믿어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참...이건 단순한 미식기행담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무라카미 류'가 쓴 글이다. 매편마다 도대체 여자 이야기가 빠지질 않는데, 그에 대한 묘사 또한 무라카미 류답다ㅡ물론 작가 본인이 말한 게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한 얘기도 있지만 어쩜 이 사람은 만나도 이런 사람들만 만나는가.

 

"예를 들면, 중국 여자의 겨드랑이 냄새 같은 게 있잖습니까? 수렵민과 농경민의 피가 미묘하게 뒤섞인 여자의 겨드랑이 냄새, 그것이 동물의 맛입니다. 뇌를 직접 자극하지요."

 

"...나는 매일 그걸 먹고, 브로드웨이의 소녀를 떠올렸던 것이다. 거죽의 거칠거칠한 감촉은 헤로인으로 피폐해진 소녀의 피부를 연상시켰다. 아우슈비츠의 안네 프랑크 같은 소녀에게 욕망을 느낀 이유가 송아지 갈비 속에 들어 있었다."

 

"...여자의 새끼발가락 크기의 미끌미끌한 덩어리, 그 표면의 엷은 막을 씹으면, 질 좋은 올리브 오일가 농축된 밀크를 섞은 듯한맛이 입 속으로 퍼져나가면서 카레의 자극을 모두 지워버린다." 

 

ㅡ모든 요리에 대한 묘사가 여자와 관련된 건 아니다. 음식을 처음 혀끝으로 음미하고 식도를 넘어 위장으로 건너보내기까지의 묘사를 어찌나 감각적으로 했는지, 글을 읽다보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순록의 간맛마저 대략 어떨지 감이 올 정도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에 실린 요리들 중엔 한국의 삼계탕도 나오는데, 무라카미 류의 어머니가 한국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덕택에 그 역시 게장이나 곱창 같은 한국음식을 좋아한다고.

 

"...수프는 담백한데, 닭은 젓가락만 갖다대도 살이 떨어질 정도로 부드럽게 삶아져 있고, 인삼의 강렬한 향기도 풍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명을 입 속에 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무튼 내가 이날이태까지 나왔다하면 게눈감추듯 먹어치우던 삼계탕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묘사하다니 거참 내가 삼계탕에게 미안할 지경. 

 

그런데 참 놀랍게도, 요리 얘기임에도 섹스와 약물 이야기가 빠지지 않아서일까 이런 생생한 묘사를 읽으면서 전혀 식욕이 들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이 책은 음식을 찬양한다기보단 무라카미 류가 이런 기묘한 미각을 가졌고 이런 독특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일화에 그저 음식 하나만 얹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매력이 떨어지진 않다. 맛있는 음식들이 무라카미 류의 혀와 손을 거쳤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책이다. 아마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지 않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접한 사람들이라면, 그 옛날 나처럼 "뭐야 무서워 음식에 이따위 묘사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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