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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Text road

[한국소설] 종소리

 


종소리

저자
신경숙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3-03-0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신경숙의 다섯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이번 소설집의 특징은 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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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돌아온 새 같다.
이젠 어디에나 깃들일 수 있는 새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신경숙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항상 돌아오는 답변은 "난 그 작가 답답해서 싫던데."였다. 신경숙의 문체가 워낙 잔잔하고 느려서 그렇다. 신경숙의 소설은 확실히 요즘처럼 직설적이지 않다. 소설집 '딸기밭'은 몽환적이기까지 하고. 마치 참한 여자의 둥그런 손글씨처럼 유순한 묘사가 신경숙의 특징이다. 요즘 작가들의 소설이 "지금 내 기분은 이거야."라고 딱 집어서 말해준다면, 신경숙의 소설은 "지금 내 기분은 이거에요." 하다가도 "아..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런 신경숙의 문체를 좋아한다.
좋아하다 못해 갖고 싶어서 노트에 그녀의 소설을 줄줄이 쓸 정도였다. 어쩌다 한번 내가 쓴 글이 신경숙 소설같다는 말을 들으면 하루종일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만약 소설가가 된다면 간절히 바라건대 이 사람처럼 쓰고 싶다고. 지금도 그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신경숙에 대해 포스팅을 써보는데, 무지한 일개 독자가 감히 아는 척해보는 주저리로 봐줬음 좋겠다. 지금까지 쓴 영화나 책 등의 포스팅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쓰게 된다.  

 

신경숙의 소설에 변화가 온 시점은 내 생각에 'J이야기' 같다. 이 작품 이전의 소설들이 어두운 방에 오롯이 앉아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면, 'J이야기'는 그 여자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햇살에 말간 얼굴을 쬐는 모습이다. 이전보다 더 쉽고 밝은 주제도 신경숙의 작품세계에선 큰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소설집 '종소리'가 나왔을 때. 첫장을 펴는 순간 나는 첫 문장에 정신을 빼앗겼다. 잊고 있던 감동이 싸하게 가슴에 퍼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돌아온 새 같다. 이젠 어디에나 깃들일 수 있는 새 같다ㅡ이토록 서정적인 표현. 신경숙의 소설을 읽고 있자면 단순히 타이핑된 텍스트마저도 생명이 깃드는 것 같다. 지금도 '종소리'의 첫 장을 펴면 그 순간만큼은 하얀 종이 위에 까만 텍스트 사이로 내 몸이 훌쩍 뛰어든 느낌이 든다. 나름 여러 소설을 읽어왔지만 한번도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준 소설이 없다.  

깃들이지 못해 떠날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생각했다. 괴롭히지 않으려면 단 한마디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덤불 속을 빌딩 속을 지하도를 굳은 얼굴로 헤매게 되더라도. 당신을 위해서만이겠는가. 아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더이상 견디기 힘들어서이다. 당신 곁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은 나를 괴롭히지 않기에.

- 단편 '종소리' 중

...야릇한 일은, 처음의 두려움은 가라앉고 자꾸만 여자가 가엾게 생각되는 거에요. 그래서 집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저녁밥을 지었네요. 굴비를 꺼내 굽고 쇠고기를 넣어 미역국을 끓였네요. 참나물을 파랗게 삶아 무치고 가지를 어슷어슷하게 썰어 간을 맞춰 프라이팬에 볶았습니다. 김치를 꺼내 썰어 접시에 담고 물김치도 한 사발 담아놓았습니다. 식탁에 수저를 두 벌 놓았지요. .....밥이나 먹고 가세요, 말을 건넸습니다. 싫어두 한 숟갈 더 드세요, 굴비의 흰 살을 발라 얹어주었네요. 미역국에 숟가락을 담가주었네요. 참나물을 밥 위에 올려주었네요.

- 단편 '우물을 들여다보다' 중 

유순한 문체와는 달리 현대 사회의 고독과 뿌리깊은 자아분열을 다뤄왔던 신경숙의 주제의식은 이 단편집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주제들은 여느 소설에서나 자주 다뤄오긴 했지만 신경숙의 소설은 가시가 없다. 독자를 머쓱하게 만드는 냉소가 없다. 주제의식을 어떻게든 독자의 입에 꽉꽉 쑤셔넣으려는 억지스러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숙의 소설 속 사람들은 우울한 현실의 고통을 비명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 따뜻한 통증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