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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Text road

[특집] 무라카미 하루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끔찍이 위하셨어. 아마 아들인 나보다도 어머니를 훨씬 깊이 사랑하셨다고 생각해.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지. 당신 손으로 얻은 것을 사랑하는 분이셨어. 아버지에게 있어 나는, 자연스럽게 결과적으로 손에 들어온 것이었어. 아버지는 물론 사랑해주셨어. 오직 하나뿐인 아들인데 오죽했겠어. 하지만 어머니를 사랑한 만큼은 아니었어. 그건 나로서도 잘 알고 있었다네.

- <렉싱턴의 유령> 중 단편 '렉싱턴의 유령'에서

올해 노벨문학상은 <붉은 수수밭>의 작가 모옌에게 돌아갔다. 과연 이번엔 노벨상을 탈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각축을 벌였던 무라카미 하루키로선 올해도 상복이 없었던 셈이다. 장예모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었던 <붉은 수수밭>과 비교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은 역사성이 덜하고 좀 더 개인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무국적성이 세계적으로 그의 작품들이 많이 읽힌 데에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카프카상을 받은 뒤로 이제 노벨문학상만 남았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았던 터라 매년 이 시기가 되면 그의 이름이 회자되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가벼움 때문에 문학작품으로서 별 매력을 못느끼는 것 같다. 사실 나 역시 그의 장편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이 있는지라 충동적으로 샀던 <꿈속에서 만나요>를 읽고 나선 거의 분노할 뻔했다. 지나치게 내포적이고 상징적인 그의 작품들이 그렇다고 환상문학으로 묶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리한 장편을 다 읽고 나면 그 속에서 허무한 무위(無爲)를 느끼는데, 그렇다고 그가 허무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즉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감각적인 아이콘 투성이의 글을 읽고 난 느낌이다. 

 


렉싱턴의 유령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사상 | 2013-05-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하루키 원숙기에 쓰여진 단편문학의 정수, 『렉싱턴의 유령』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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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들 말입니다.

- <렉싱턴의 유령> 중 단편 '침묵'에서

그럼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단편집이 있다. <렉싱턴의 유령>과 <도쿄기담집>이다. 이 작품들을 읽다보면 인간의 내면과 무의식을 깔끔하고도 심도있게 표현하는 하루키의 유려한 매력을 알 수 있다. 사실 하루키 문학은 굉장히 개인적이다. 외부로의 인식보다 인간 내부의 형이상학적인 심리를 표현하는데, 그래서 대부분의 단편들이 고독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글이 마냥 우울하지도 않고 무미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해서 각광을 받는 면도 있다. '쿨병'이라고 비아냥을 사기도 하는 그의 작품의 전체적인 냉소주의가 사실상 현대 일본문학의 한 획을 그은 것도 사실이다. 그의 분위기를 모방하는 일본 소설들(라이트노벨을 포함해서)이 이른바 '하루키 칠드런'세대로 등장한 것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저 과대평가받는 세계적인 문학가는 아님을 보여준다.   

Lyndon hayes. 출처 : http://www.lyndonhayes.co.uk

내가 울면, 얼음사나이는 내 뺨에 입을 맞춘다. 그러면 내 눈물은 얼음으로 변한다. 그러면 그는 그 눈물의 얼음을 손으로 떼어내어 혓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저 말이야, 난 당신을 사랑해, 하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얼음사나이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인지 불어 닥친 바람이 하얗게 얼어붙은 그의 말을 과거로, 과거로 계속 날려버린다. 나는 운다. 얼음의 눈물이 계속 뚝뚝 떨어진다. 머나먼 남극의 얼음의 집 안에서.

- <렉싱턴의 유령> 중 단편 '얼음사나이'에서

특히 이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에선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토니 다키타니' 단편이 실렸다. 이 작품에서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주 쓰는 '고독'의 실체가 드러난다. 시대를 타고나 풍족하고 사랑하며 사는 삶마저도 태생적인 고독으로부턴 벗어날 수 없음을, 하루키 특유의 깔끔하고 세련된 감각으로 표현한다. 스토리도 하루키 작품에서 접할 수 있는 공중에 붕 떠서 뜬구름 잡는 전개가 아니라 서사적인 형태로 진행된다. 그 외 단편 '일곱번째 남자'도 인간 내면의 심리ㅡ'공포'와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도쿄 기담집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사상사 | 2006-04-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카프카상을 수상하며 명실공히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무라카미...
가격비교

준페이는 새로운 여성을 알게 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이 여자는 나에게 정말로 의미를 갖는 상대일까 하고. 그리고 그 물음은 언제나 하나의 딜레마를 불러일으켰다. 요컨대 그는 새로 만난 상대가 '진정한 의미를 지닌' 여성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하면서, 동시에 한정된 수의 카드를 인생 초기 단계에서 다 써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겁이 나기도 했던 것이다. (...) 결국 나는 쓸데없는 건 잔뜩 가졌으면서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놓쳐버리는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자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음은 밝은 빛과 따스한 온기가 결여된 곳으로 잠겨들었다.

- <도쿄 기담집> 중 단편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에서

단편집 <도쿄 기담집>은 여전히 상징적이면서 기이한 소재들이 쓰이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곁가지인 반면 인간 내면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어 몰입도가 엄청나다.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정체성들ㅡ이름, 직업, 가정 내의 지위 등ㅡ은 어쩌면 텅 빈 내면을 감싼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거칠게 깎이고 부딪친 흔적이 없는 내면을 가진 사람에게, 그러한 사회적 증거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안을 똑바로 바라볼 때만이 주체적인 인간일 수 있음을 단편 '시나가와 원숭이'에서 말하고 있다. 현실세계는 그저 지긋지긋한 피로물질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주는 단편 '어디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냉소가 극치에 달한다.

 Lyndon hayes. 출처 : http://www.lyndonhayes.co.uk

앞서 소개한 두 단편집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취향들을 간간이 옅볼 수 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재즈부터 시작해 랄프 로렌, 알마니와 같은 패션까지. 그의 취향들은 다들 좀 올드한 편인데 이것들이 유독 강조된 작품들을 읽다보면 허세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근데 그가 자기 취향 방면으론 조예가 깊은 것도 맞긴 맞다. (기차 식당칸에서 스테이크 썰고 와인을 고집할 정도면 허세...) 그의 작품들은 대개 허무하고 냉소적인 경향을 띠지만, 오히려 하루키 본인은 마라톤에 수영 등을 즐겨하는 활력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외국문학에 강한 영향을 받은 탓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일본소설과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이 많이 든다. 그리고 그런 점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탐독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큼 깊이 있는 작가인진 모르겠으나, 두 단편집을 읽어보면 그가 개인화된 사회에서 누구나 느낄 법한 인간 내부의 심층의식에 대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무덤덤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능한 작가 중 하나란 사실엔 어느 정도 수긍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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