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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M to M

[음악] 지구종말까지, 화이팅!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종말로 한창 떠들썩했을 때, 전 퇴마록을 즐겨읽던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당시 퇴마록이 주로 다루고 있던 소재도 '홍수'라든가 '해동감결'과 같은 지구 종말이었죠. 사실상 퇴마록을 접한 것을 계기로 이 '종말'이라는 단어에 한때 심취했었고, 마침 시기를 잘 만나 각종 종말에 대한 도시괴담류의 콘텐츠를 맘껏 즐겼습니다.

보통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미디어 및 각종 문화현상을 두고 '세기말 감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요. 주류에 반하는 혼성장르가 쏟아져나오고 그 당시 정서로는(현재도) 받아들이기 힘든 감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세대 변동에 따라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빠르게 교체되고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혼돈이 믿든 안믿든 99년 이후 지구가 종말한다는 예언과 묘하게 일치한 것이 바로 '세기말 감성'이 아닐까 합니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이렇게 혼란한 세상이 마치 종말을 앞둔 아비규환과 같다는 일종의 묵시록같은 정서 아니었을까요. 지금이야 노스트라다무스가 다 뭐냐하고 웃고 말지만, 그 당시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 전세계적인 신드롬이었습니다. 밀레니엄이 오면 모든 컴퓨터가 2000이란 숫자를 인식하지 못해 다운된다느니,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종말이 전염병이라느니. 이런 공포 분위기를 타고 데이빗 핀처의 <세븐>과 같은 영화들이 쏟아져나오기도 했죠. 물론 2000년으로 무사히 해를 넘기면서, 종말에 대한 심각한 분위기는 이제 우스개 취급을 받고 바야흐로 테크노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런 와중에 아직 식지 않은 저의 세기말 감성을 불러일으킨 노래가 있었죠. 바로 위딘 템테이션(Within temptation)입니다. 중학교 시절에 이 밴드의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그 첫 곡이 'Mother earth'였습니다. 이 밴드의 보컬 샤론은 개인적으로 사라 브라이트만 다음으로 고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 곡이 세기말 감성을 일으켰는지는 가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Birds and butterflies
Rivers and mountains she creates
But you’ll never know
The next move she’ll make
You can try
But it is useless to ask why
Cannot control her
She goes her own way

새들과 나비들
강과 산, 모두 그녀가 창조했지
하지만 너는 결코 모를 거야
그녀가 다음으로 창조할 것이 무엇인지
넌 노력할 수 있지
하지만 이유를 묻는 건 부질없어
그녀를 절대 막을 수 없으니까
그녀는 그녀의 뜻대로 하지

She rules until the end of time
She gives and she takes
She rules until the end of time
She goes her own way

종말의 그 날까지 그녀가 지배한다
그녀가 주고 그녀가 가져갈 거야 
종말의 그 날까지 그녀가 지배한다
그녀는 그녀의 뜻대로 하지

 

....대략 여기까지가 이 노래의 1절입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그녀'란 이 세상을 만든 조물주, 혹은 창조자, 혹은 절대자와 같은 인상을 줍니다. 전 종교는 없지만, 대략 위딘 템테이션이 이 노래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예의 세기말 감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단 이 노래뿐만 아니라 Ice queen, Dark wings 등 다른 노래에서도 항상 '그녀'(She)가 등장합니다. 정작 이 노래는 2001년에 나왔지만 말이죠.

참고로 Mother earth는 우리나라에서 <2004 인간시장> 드라마가 나왔을 때, 가수 김경호가 '심판의 날'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한 적이 있습니다. 원곡도 좋지만 김경호가 부른 '심판의 날'도 원곡 못지않죠.

 

위딘 템테이션은 1997년 첫 앨범 [Enter]로 시작해 2007년까지 활동했던 심포닉 메탈밴드입니다. 심포닉 메탈이란 쉽게 말해 관현악과 메탈의 교배라고 할 수 있는데요. 흔히 오케스트라 락을 일컬을 때 함께 소환되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더 세분화해보면 고딕 메탈, 블랙 메탈로도 이동이 가능하죠. 오페라적 요소가 강하며, 합창이 들어가는 등 웅장한 곡이 특징입니다. 위딘 템테이션과 비슷한 밴드로는 라크리모사(Lacrimosa)가 있습니다.  

위딘 템테이션의 활동 기간은 꽤 짧았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강렬하고 화려한 사운드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대표곡 Mother earth 처럼 묵시록적인 컨셉이, 묘하게 심포닉 메탈과 어울려서 밴드 이미지를 독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위딘 템테이션을 벤치마킹해서 나온 밴드가 바로 에반에센스(Evan essence)죠. 심포닉 메탈이라고 할 순 없지만, 장르의 특성을 좀 더 대중적으로 어레인지하면서 위딘 템테이션의 컨셉도 이어받았습니다. 특히 위딘 템테이션의 보컬 샤론과 에반에센스의 보컬 에이미 리의 목소리가 많이 비슷한데요. 위딘 템테이션의 Stand my ground를 들어보시면 에반에센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세기말 감성은 지금 와선 다소 촌스럽다는 평을 듣지만, 그 촌스러운 맛이 또 세기말 감성의 정수이기도 합니다. 어설픈 공포 분위기 조장과 저화질, 난잡한 편집, 징벌에 대한 두려움 등은 세기말 감성을 취한 콘텐츠들의 묘미이기도 하죠. 그 수많은 콘텐츠 중에서도 위딘 템테이션은 심포닉 메탈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친 밴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