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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영화식사

[ 영화식사 015 ] 고상한 취미라도 강요하지 말라

[ 영화식사 015 ] 고상한 취미라도 강요하지 말라

ㅡ영화 <사랑을 위하여>

   

 

줄리아 로버츠의 얼굴에서 매력을 꼽으라면 단연 그 시원한 입매다. 조그만 얼굴에 꽉 찬 큰 입이 미소로 벌어지면 같은 여자라도 살살 녹는다. 한때 전성기를 구가한 대배우답게 그녀의 대표작 중 <노팅힐>(1999), <클로져>(2004) 등이 많이 언급되지만, 교양 있고 얌전한 역할보다 그녀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역할은 따로 있다. 가난하지만 억척 있고 다소 경박하기까지 한 주인공을 맡았던 <사랑을 위하여>(1991)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남자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게끔 이끈다. 가난한 여자가 부잣집 남자를 만나 신선한 매력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은 일견 <귀여운 여인>(1990)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랑을 위하여>의 원제 Dying young이 말해주듯 이 영화에서 힐라리(줄리아 로버츠)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연인 빅터(캠벨 스콧)와 아슬아슬한 사랑을 이어간다.

 

 

시한부 연인의 사랑 이야기야 이미 90년대에도 고루한 설정이지만,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 영화의 장면은 따로 있다. 오랜 투병과 예민한 성격 탓에 주변에 친지들도 없이 은둔 생활을 하는 빅터는 간병인 힐라리에게도 서툰 화법을 구사하는데, 그 중 하나가 그림 보여주기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클림트의 작품들을 힐라리에게 보여주며 그림의 배경과 가치 등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그러자 클라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성질을 내버리고, 빅터는 당황한다.

나의 취미를 누군가에게 강요해본 적 있는가? 가까운 형제 혹은 친구, 아니면 애인에게라도. 빅터처럼 고상하진 않아도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를 누군가가 함께 좋아해줬으면 하는 욕심을 부린 적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거부당했을 때의 씁쓸함도 느낀 적이 있다면 이 영화에서 억지로 클림트 그림을 봐야했던 클라리를 눈 여겨 봐야 한다. 클림트의 ‘키스’가 얼마나 아름답고 뜨거운 감정을 그리고 있는지 클라리는 알고 싶지 않다. 또한 빅터가 왜 클림트를 가장 좋아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다. 내게 그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자신의 즐거운 취미가 상대방으로부터 거부당했을 때 느꼈을 빅터의 당황과 서운함이 이해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클림트에 대한 빅터의 일장연설을 지루해하는 클라리를 보면, 빅터의 서운함도 철없는 투정으로 비친다. 때때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인에게 들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가 그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클라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설령 고상한 취미일지라도 강요하지 말자고.

  

<사랑을 위하여>(1991)

조엘 슈마허 감독의 미국 영화.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주인공 빅터 역을 맡은 캠벨 스콧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리처드 파커 역으로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