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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M to M

[SF] 퍼시픽 림, 그리고 길예르모 델 토로

언제부턴가, 개봉작을 볼 때는 그 영화에 대한 일체의 정보도 기피하는 습관이 생겼다. 인터뷰는 물론 예고편이나 스틸컷도 피한다. 앞으로 볼 영화에 어떤 선입견도 가지고 싶지 않아서다. 예고편으로 본 장면을 극장에서 보면 감흥이 떨어지는 것도 싫고. 일련의 정보들로 영화내용을 짐작하는 것도 피하고 싶다. 내 짐작이 맞든 안맞든 영화에 대한 기대가 절감되는 건 똑같아서다.

<퍼시픽 림>도 마찬가지로 상영관에 들어서기 전까지 어떤 정보도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았다. 대략 로봇이 등장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기대했던 부분은 있었는데, 그건 감독의 이름 때문이었다. 길예르모 델 토로. 수작과 평작을 오가는 이 불안한 감독이 과연 어떤 블록버스터를 내놓을까. 이런 막연한 기대로 <퍼시픽 림>을 감상했다.

 


퍼시픽 림 (2013)

Pacific Rim 
6.6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
출연
찰리 헌냄, 이드리스 엘바, 키쿠치 린코, 찰리 데이, 로버트 카진스키
정보
SF | 미국 | 131 분 | 2013-07-11

 

<어벤져스>나 <아이언맨> 등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대개 개봉할 때부터 일종의 면죄부를 얻는다. 스토리는 산으로 가지 않는 한 평범해도 좋다. 단, 뛰어난 볼거리를 제공할 것. 스토리가 얼마나 유치하든 스펙타클한 장광을 보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관객은 충분히 만족한다. 이런 영화들을 보고 미국식 영웅주의니 우월의식 등을 비판하는 일은 지금에 와선 별로 의미가 없다. 관객들 역시 그러한 맥락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장르가 딱히 서사를 중점으로 하지 않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관객의 수준을 폄하해선 곤란하다. 영화가 주는 경험은 서사적인 텍스트 이외에 기술적인 측면이 반드시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가 단지 기술적인 우위로 빈약한 서사조차 관대해질 수 있는 분야였다면, 지금과 같은 대중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이미지가 주는 스펙타클만으론 관객의 감동과 애정을 독차지할 순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트랜스포머3>. 후속작으로 갈수록 더 강하고 더 다양한 캐릭터가 쏟아졌지만, 속 빈 강정같은 전개에 관객은 질려버렸다. 자극적인 연쇄살인으로 신드롬을 몰고 왔던 <스크림> 시리즈. 종래엔 3D로도 나왔지만 최악의 평점을 받았다. 3D로 나오든 4D로 나오든 시드니와 친구들이 살인마에게 쫓기고 죽는 건 똑같은데 무슨 주목을 받을까. 기술이 빚어낸 이미지의 효과만으론, 영화가 가진 서사의 매력을 커버할 순 없는 것이다.

 


기골이 장대하도다

<퍼시픽 림>은 전례없는 초대형 로봇과 괴수가 주는 위압감만으로 충분히 시각적인 만족을 채워주는 영화다. 또한 <헬보이2> 를 제작한 길예르모 델 토로가, 기술력에 힘입어 이만한 역량을 보여준 것도 팬으로선 뿌듯한 감동이다. 하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을 생각하면 한편으론 아쉬움을 토로해도 남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정교한 상상력과 어둡고 슬픈 세계가 매력인데, <퍼시픽 림>에선 이러한 감독의 섬세함이 묵살당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깊게 음미하며 뜯어먹는 빵 한조각을 입으로 급히 우걱우걱 쑤셔넣는 기분. 온갖 클리셰를 답습하는 뻔한 전개는 <퍼시픽 림>과 같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전작을 통해 보여준 길예르모 델 토로식 서사의 장점이 블록버스터와 조화를 이루길 바랐지, 거기에 매몰되기를 원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퍼시픽 림>에서 카메오로 출연해 반가웠던 헬보이 아저씨.

( <헬보이>시리즈도 그 시절을 고려하면 꽤 첨단적인 특수효과가 쓰였지만, 그보다 다크히어로를 묘사하는 길예르모 감독 특유의 어두운 감성이 이 영화를 수작으로 만들었다. 또한 <헬보이>가 코믹스에 기반한 영화였고 <퍼시픽 림>은 감독 오리지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지와의 조우 - 이 세계와 '이(異)' 세계

그럼에도 <퍼시픽 림>은 분명 길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다. 전작들을 봤을 때 길예르모가 <퍼시픽 림>과 이어지는 부분이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이(異)세계와 현실의 충돌. 길예르모의 영화엔 거의 항상, 현실과 맞닿아있지만 이질적인 '저 세상'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현실세계는 암울하다. 주인공은 불안한 삶을 살고 있고, 정서적으로도 고립되어 있다. 그러다 맞이하는 '저 세상'은 마치 현실을 반영하듯 기괴하다. 기괴하고, 순수하다. 복잡하게 얽힌 현실보다는 오히려 명쾌한 세상이다.

 

 

<판의 미로>에선 스페인 내전으로 공포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소녀가 요정 '판'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 피비린내가 나는 이곳은 사실 소녀의 세계가 아니며, 원래 자신이 있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몇 가지 일을 수행해야 한다. 여기서 소녀ㅡ오필리아가 꿈꾸는 세계는 온전한 부모가 있는 행복한 왕국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마치 사후세계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혹은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소녀의 판타지일 수도 있다. 길예르모 델 토로는 친절하게도 영화 말미에 '그 세계는 믿는 사람들에게만 보인다'라고 설명해준다.  

 


영화 <비우티풀>. 중년간지가 넘쳤던 하비에르 바르뎀.

 

길예르모 감독이 제작에 참여한 <비우티풀>과 <오퍼나지-비밀의 계단>에서도 '저 세상'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사후세계에 가까운데, 여기서 묘사된 '저 세상'은 현실에서 해방된 주인공이 비로소 구원을 얻는 곳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세상'이 현실보다 행복하거나 낙원이라는 묘사는 일체 없지만...현실과 '저 세상'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현실은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악마의 등뼈>는 사후세계를 그리되 더욱 심오한 영화다. '등뼈'(Back bone)는 신체부위를 가리키는 것 외에 재정상태를 책임지는 기둥의 의미로도 쓰이는데, 흔히 "등골 빼먹는다"는 우리나라 말과 비슷한 의미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 들어온 주인공 소년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게다가 고아원 아이들은 신입에게 적대적이고, 아이들을 통솔하는 청년은 끔찍하게 폭력적이다. 어른의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들. 그리고, 죽은 태아로 담근 술을 밀거래하여 고아원의 재정을 충당하는 원장. 원장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이지만, 이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인륜을 져버린 행위를 하는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악마의 등뼈>는 살기 위해 죽음을 가까이하는 모순된 현실을 표현한 제목이다. 스페인 내전으로 피폐해진 풍경과 버려지는 아이들, 폭력의 광기를 대물림하는 어른. 살기 위해 가해지는 폭력. 주인공 소년은 유년시절 고아원에서 만났던 유령소년과 조우함으로써 더욱 잔인한 현실의 참상을 목도한다.

 

 

<퍼시픽 림>에서도 길예르모 델 토로의 단골소재인 '이(異) 세계'가 등장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전작들보단 섬세하지 못하며, 철학적인 깊이도 없다. '브리치'를 통해 연결된 다른 차원의 세계는 그저 지구를 침략하고자 끝없이 클론을 보내는 괴수들의 고향일 뿐이다. 이 단순한 설정에 그래도 생명을 주고자 '드리프트'니 뭐니 너드 캐릭터 두 명을 데리고 나름대로 설명을 하지만....문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지루한 부분이었다는 점이다. 카이주의 뇌와 드리프트를 하고 코피를 흘리고 신선한 뇌를 얻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영화를 늘어지게 했다.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이 특징인 길예르모 감독의 장점이, <퍼시픽 림>에선 오히려 서로 안맞는 술을 섞은 듯이 떫은 맛만 낸 것이다.  

<퍼시픽 림>을 보고난 뒤. 길예르모 델 토로가 탐닉하는 장르는 뚜렷하지만, 그 다음을 더욱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냥 이 사람은 공포라면 다 좋아해!) 개인적으론 <미믹>이나 <마마> 뭐 이런 것보단 <악마의 등뼈> 혹은 <판의 미로>같은 작품을 더 해줬으면 하는데....하여튼 무시무시한 걸 좋아하는 감독이니 그의 차기작도 수작과 평작을 오락가락하지 않을까. 대개 공포 장르가 그렇듯. <퍼시픽 림>에선 압도적인 크기로 무서움을 자극했다면, 다음에 그가 공포심을 이끌어낼 발상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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