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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M to M

[공포] 애나벨

 

 

<애나벨>을 봤습니다. <컨저링>의 속편이라고 홍보하던데, 사실 두 영화가 연결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애나벨>은 웬 저주받은 인형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온갖 수난을 다 겪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굳이 <컨저링>을 보지 않아도 어려움 없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애나벨 (2014)

Annabelle 
7.2
감독
존 R. 레오네티
출연
애나벨 월리스, 워드 호튼, 알프레 우다드, 에릭 라딘, 토니 아멘돌라
정보
공포 | 미국 | 98 분 | 2014-10-02

 

 

대개 공포영화에 대한 평가는 쉽게 무섭다/안 무섭다로 갈리는 것 같습니다. 장르물이 떠안을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책무이자 과제이기도 합니다. 액션물을 보고 짜릿하다/지루하다 이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듯이, 공포영화 역시 관객을 얼마나 무섭게 하느냐의 양자택일로 승패가 결정되죠. <애나벨>을 본 뒤 왓챠에서 평점을 보니 꽤 낮더군요. 관객평도 좋진 않습니다. 하나도 안 무섭고 웃음만 나왔다는 얘긴 극장을 나올 때부터 들었던 평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공포영화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인 평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공포심이란 상대적인 거니까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만 봐도 무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칠갑을 한 귀신이 스크린을 꽉 채워도 시큰둥한 사람이 있죠. 뭐가 더 무섭냐고 우열을 따지기 어렵습니다. 공포영화의 묘미는 공포심을 측정하기 보단, 그러한 관객의 심리적 동요를 위해 어떤 장치를 마련했는지. 그리고 장르적 특성을 얼만큼 고민하고 잘 활용했는지를 따지는 재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형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애나벨>은 나름대로 다양한 장치를 준비했더군요. 특히 영화 내내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 인형을 마치 화면이 멈춘 듯 롱테이크로 찍은 장면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인형을 선반 위에 올려두고 방을 나갔는데, 카메라가 계속 그 인형을 비추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고요한 정적을 깨고 금방이라도 인형이 목을 돌리거나 눈을 깜박일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아무튼 뭐 하나라도 움직이지 않을까 긴장하게 되죠. 결국 아무 일 없이 화면이 전환되면 그제서야 관객은 싱겁다고 느끼지만, 화면이 전환되기 전 그 심리적 긴장감은 정말 재미있어요. 영화 내내 스스로 걷지도 않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인형의 역할도 참 괜찮은 설정이죠. 만약 인형이 목을 180도로 꺾거나 말을 했다면 그때부터 이 영화는 코미디가 되었을 겁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패닉에 빠뜨리는 건 인형이 아니라 그 인형에 씌인 여자의 원혼입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바로 <애나벨>이죠. 사탄을 숭배하는 사이비에 빠져있던 여자가 친부모를 살해한 뒤, 자살하면서 이 인형을 끌어안고 죽습니다. 왜 이 인형에 집착했는지는 좀 애매합니다. 영화에선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제물이나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왜 하필 그 인형에 집착했는지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은 인형이 아니라 주인공의 아기거든요. 뭐 아무튼 그 여자가 죽으면서 그 피가 인형의 눈에 들어갔고, 그 후로 여자의 원혼이 인형에 씌였다고만 짐작해봅니다.

 

가장 인상적인 지하실 씬

그러므로 영화에서 주인공 가족을 괴롭히는 건 인형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산발을 한 여자가 주인공에게 마구 달려들며 쫓아다닐 때도, 인형은 얌전히 선반 위나 의자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근데 갈수록 인상이 무시무시해집니다. 쓰레기통에 한번 쳐박혔다가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등 산전수전 다 겪고 나니, 마지막엔 괜히 미안할 정도로 인상이 안 좋더군요.

 

소소한 서스펜스도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 집 천장을 두드리는 층간소음이나, 어느 집에 사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섬뜩한 그림 등등. 층간소음의 정체는 나중에 밝혀집니다만, 아이들과 그 그림의 정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점이 참 좋네요. 주인공의 아기가 차에 치어죽는 그림을 정말 그 애들이 그렸는지도 알 수 없죠. 특히 그 차에 치이는 과정을 그려서 계단을 오르는 주인공 앞에 한 장, 한 장 떨어뜨리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주인공의 공포가 차차 극대화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아니라 아기가 위험하다는 새로운 불안이 싹트는 시발점이기도 하죠.

 

 

엉성한 스토리라인에 대한 실망

 

영화 내내 긴장감을 끌고 가는 연출, 그리고 주인공을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는 적절한 완급 등 <애나벨>은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토리라인은 정말 아쉽더군요. 적어도 초중반까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컬트 영화답게 교회 신부님이 등장하고 악마가 연관되어 있으며, 이상하게 주인공이 궁금한 걸 빠삭하게 알고 있는 흑인 아줌마가 나오는 건 이해한다 쳐도요. 모든 오컬트가 종교와 배척하지 않을 뿐더러, 이 영화에서 종교에 대한 믿음이 해결해 주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인간은 모두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 "희생이야말로 궁극적인 사랑이다" 따위의 말들이 결국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키워드가 되고 맙니다. 이왕 오컬트 영화의 클리셰를 따라가기로 했으면 연관성이라도 만들었어야죠. 앞서 언급한 등장인물들은 단지 기능적인 역할만 할 뿐입니다. 즉 장르와 스토리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입니다.

 

오컬트 영화니까 신부님도 나와야겠고, 악마도 나와야겠고, 흑인 아줌마도 나와야겠고. 근데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겠으니 기존 오컬트 영화에서 쓰던 역할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의례 그렇듯 종교적 사명으로 마무리하죠. 관객 입장에선 신부님을 날아가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던 악령이 왜 갑자기 멈췄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마 흑인 아줌마의 희생에 감복해서는 아니겠죠. 가장 순수한 영혼인 아기를 죽임으로써 악마를 소환하고자 했던 악령이, 나중에 가선 그냥 아무나 죽어라! 그럼 아기는 살려줄게. 이런 식으로 교섭을 시도하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등장인물이 각자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려니까 스토리에 억지가 생기는 겁니다.

 

사실 신부님이 제일 무섭습니다ㄷㄷ;;

클리셰엔 죄가 없다

 

장르적 속성이 강한 영화에서 클리셰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클리셰의 반복, 클리셰의 답습, 클리셰로 점철.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영화에서 클리셰를 따라갔다는 말은 분명 좋은 말이 아니죠. 하지만 저는 클리셰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진 않습니다. 잘만 활용하면 영리한 영화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이미 많은 영화들이 보여줬죠. 대표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나 주성치 등의 작품에서요.

 

영화 <애나벨>에서 나타난 일련의 공포장치들도 사실 그렇게 새로울 건 없습니다. 인형을 롱 테이크로 잡는다든가 아이들이 그린 소름끼치는 그림 등등 이런 건 수많은 공포영화들이 차용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다만 모든 옷에는 그 옷에 맞는 구두가 있듯이, 이 많은 클리셰 중 그 영화에 어울리는 것을 적재적소에 넣는 감독의 선택이 중요하죠. 그런 면에서 <애나벨>은 나름대로 덜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사용법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쉬운 면은 있어요. 앞서 말했듯 스토리가 심하게 엉망이었고, 오컬트와 인형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아깝긴 합니다. 이왕 비슷한 소재의 영화라면 <데드 사일런스>가 한 수 위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