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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Text road

[추리] ABC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의 18번째  작품이자, 포와로가 등장하는 11번째 사건이기도 한 <ABC 살인사건>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은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중 가장 위험한 범죄자 3위에 꼽히는 인물이 나옵니다.

 


ABC 살인사건(애거서크리스티 추리문학베스트 4)

저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출판사
해문출판사 | 2002-05-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온 영국이 공포 속에 떨고 있다. 명탐정 에르큘 포와르에게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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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선정한 '포와로가 만난 가장 위험한 범죄자 TOP3'를 뽑아보자면, 대략 이렇습니다. (스포일러이므로 정확한 범인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1위 - <커튼>의 범죄자 X

2위 - <13인의 만찬>의 범죄자 <--개인적으로 가장 골때리는 범인입니다

3위 - <ABC 살인사건>의 범죄자

 

왜 위험한가하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일면식 없는 사람의 생명도 죄책감없이 해치기 때문입니다. 저 세 작품에 나오는 범인 모두 연쇄살인을 저지른단 점도 공통적인 특징이죠. 본인의 쾌락, 명예, 돈을 위해서라면 몇 명이고 거침없이 해치우며 이를 위해 정교한 계획까지 세우는 위험한 범인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목표했던 한 명만 죽이는 다른 작품의 범인들은 얌전한 편이죠.

raphaël vicenzi. http://www.mydeadpony.com/

 

 

 이 달, 앤도버를 조심하십시오

 

이야기의 시점은 1935년 6월입니다. 남아메리카에 있던 농장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헤이스팅스는 에르큘 포와로를 만나러 갑니다. 아내를 두고 왔다고 하는 걸로 보아, <골프장 살인사건> 이후의 시점인 듯 합니다.

포와로는 런던에 한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그 아파트를 선택한 이유는 단지 정확히 직사각형인 건물 외관이 마음에 들어서였죠. 코트에 묻은 얼룩이 총탄보다 아프다는 포와로답게, 그는 언제나 질서정연하고 반듯한 각도를 선호합니다. 이를 두고 헤이스팅스는 "이런 집에선 암탉도 네모난 달걀을 낳을 수 있겠다"며 농담을 던지죠.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던 중, 포와로는 헤이스팅스에게 자신의 앞으로 온 익명의 편지를 건네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에르큘 포와로ㅡ

멍청이 같은 우리 영국 경찰이 미스터리를 풀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현명하신 포와로 씨는 어떨는지요? 아마 당신에게도 쉬운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이 달 21일, 앤도버(Andover)를 조심하십시오.               

                                            ABC 」

 

헤이스팅스는 그저 시시한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포와로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감지합니다. 이들과 잘 알고 지내는 런던 경시청의 재프 경감에게도 이 편지를 보여줬지만, 재프 경감 역시 이런 장난은 흔하다며 대수롭잖게 여기죠.

 

그리고 22일, 재프 경감은 포와로의 자택을 방문해 어제 아무 사건사고도 없었다며 포와로를 안심시킵니다. 포와로는 자신이 이제 늙었나보다며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합니다. 이때 헤이스팅스와 둘이 나누는 대화가 아주 가관입니다. 포와로가 헤이스팅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사람이 음식을 주문하는 것처럼 죄를 주문할 수 있다면 자네는 무슨 사건을 선택하겠나?"

 

"글쎄요, 강도사건! 문서위조사건! 아니, 그런 것은 너무 시시합니다. 살인사건이 괜찮겠네요ㅡ피를 보는 살인사건ㅡ남자, 아니면 여자? 내 생각엔 남자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마 거물이거나 백만 장자, 아니면 정부 관료라든가 신문사 사장쯤. 그렇다면 범행 장소는 유서 깊은 도서관쯤이 어떨까요? 범행에 사용한 흉기는 날카로운 단검ㅡ아니면 조각된 석고상ㅡ"

 

포와로는 한숨을 쉬었다.

(중략)

 

"그게 자네가 즐기는 공상인가?"

"왜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포와로는 나를 가련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헤이스팅스는 본인의 평화로운 주변환경으로 인해 굉장히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상력은 빈약합니다(...) 포와로는 그런 그를 안쓰럽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며 그럭저럭 받아들이려고 애씁니다. 애초에 본인 두뇌를 따라올 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아무튼 이런 농담 따먹기를 하던 와중에, 재프 경감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앤도버에서 담배가게를 하는 어떤 노파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헤이스팅스는 다소 맥이 풀리지만(좀 더 굉장한 걸 기대했다나요) 급히 나갈 채비를 서두르며 포와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시작일세."

  

앤도버(Andover)에서 담배가게를 하던 노파 애셔(Asher)부인이 살해당한 것을 시작으로, 범인은 본격적으로 연쇄살인에 시동을 겁니다. 포와로는 거의 본능적으로, 앤도버 사건이 단순 살인사건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왜냐하면 애셔 부인이 살해당한 담배가게 계산대 위에서 철도 안내서가 발견됐기 때문이죠. 이 철도 안내서는 그 가게에선 팔지 않는 상품입니다. 게다가, 상품명은 ABC 철도안내서. 철도 역 이름이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는 안내서였습니다. 그제서야 헤이스팅스도 정신을 차리고 사건에 흥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애셔 부인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중, 범인으로부터 두 번째 편지가 도착합니다.

 

「 친애하는 포와로 씨, 어떻습니까? 첫번째는 내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앤도버 사건은 훌륭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다음은 벡스힐(Bexhill) 해안입니다. 날짜는 이번 달 25일.

일이 무척 재미있게 됐습니다!

 ABC 」

  

raphaël vicenzi. http://www.mydeadpony.com/

 

트릭보다 범죄심리

 그리고 범인의 일정대로ㅡ역시나 25일, 벡스힐에서 베티 바너드(Bette Barnard) 라는 젊은 여성이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포와로 및 런던 경시청은 열심히 피해자의 주변인물들을 탐색하며 두 피해자와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세 번째 피해자가 발생함으로서 사건은 수렁으로 빠지게 되죠. 지금까지 피해자의 이름과 지역명을 열거해보면 이렇습니다.

 

A - 앤도버(Andover)에서, 애셔(Asher) 부인 살해.  

B - 벡스힐(Bexhill)에서, 베티 바너드(Bette Barnard) 양 살해.

C - 처스턴(Churston)에서, 카미클 클라크(Carmichael Clark) 경 살해.

 

범인은 어째서 이토록 충실하게 알파벳 순서대로 지역과 인물을 골라 살해하는 걸까요? <ABC 살인사건>은 트릭보단 범죄심리를 중점으로 두고 추리를 했을 때 범인의 윤곽을 그릴 수 있습니다. 범인이 왜 ABC 철자에 집착하는지, 왜 하필 포와로에게 도전장을 보냈는지 등을 따져봐야 합니다.

 

사실 트릭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을 죽인 수법은 둔기로 내려쳤거나 목을 졸랐거나 이런 단순한 방식이죠. 중요한 건, 범인이 연쇄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범죄심리는 포와로의 전문분야입니다. 매 사건마다 포와로는 항상 범죄의 동기에서 추리를 시작합니다. 동기없는 살인은 없다. 그것이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든, 범인의 개인적인 욕구에서 나온 것이든 가장 강력한 동기가 있는 사람이 대개 사건의 범인이란 게 포와로의 철학입니다. 이번 ABC 살인사건 역시 범인이 이런 기묘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이유가 범인을 잡는 실마리입니다.

 

범인의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심리학 박사나 베테랑 형사 등이 동원되어 갖가지 프로파일링을 시도합니다. 포와로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보아 범인은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으며, 그 계획을 실수없이 저지를만큼 지능적입니다. 또한 범죄의 성공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도 많은 편이죠. 포와로는 이런 분석에 그다지 동의하진 않지만, 현재 상황으로선 범인에 대해 알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별 말을 하지 않습니다.

raphaël vicenzi. http://www.mydeadpony.com/

 그 여자, 예뻤나요?

 <ABC 살인사건>은 어째 중반부까진 포와로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작품입니다. 포와로 스스로도 자신이 미궁에 빠졌음을 시인하죠. 명탐정 포와로의 활약을 기대한 독자라면 어리둥절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 연쇄살인에 대한 포와로의 발상이 남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출발선이 달랐다고 할까요. 경시청 형사나 심리학 박사들은 이 연쇄살인이 한 똑똑한 미치광이의 욕구 충족이라는 전제 하에 수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포와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이 작위적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즉, 첫 살인사건부터 범인의 최면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포와로 한 사람 뿐이었던 셈이죠.  

그렇다보니 피해자 유족들에게 던지는 질문들도 영 엉뚱합니다. 벡스힐에서 살해당한 두번째 피해자의 유족에게 포와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여자는 예뻤나요?"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예뻤나요?" 질문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던지는데, 다들 포와로가 노망이 났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저 질문이 사실상 후반부에선 포와로의 추리에 강력한 힘을 실어줍니다.

 (애초에 포와로가 주인공인데 주인공 말이 핵심이 아니면 뭐겠어요...)

 <ABC 살인사건>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중 하나로, 지금도 종종 언급되는 작품입니다. 살인의 트릭보단 범죄의 전체적인 트릭을 유도하여, 독자에게 최면을 건 작품이기도 하죠. 작가와 독자의 팽팽한 심리 싸움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가 던진 힌트를 믿고 추리를 할 것이냐, 믿지 않고 독자적인 추리를 할 것이냐는 포와로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는 종종 치사하다는 평을 듣곤 하는데, 다음엔 이 비판이 극에 달했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