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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Visual road

[연극] 푸르른 날에

 


푸르른 날에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출연
박윤희, 김영노, 최광희, 김학선, 남슬기
기간
2012.04.21(토) ~ 2012.05.20(일)
가격
전석 25,000원

 

저번에 온오프믹스를 통한 '크리에이터로 살아가기' 강연에서 고종석 연출가를 만났었는데 그 분의 연극을 실제로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푸르른 날에'. 포스터를 보고 웬 애틋한 사랑이야기인가 했지요. 항상 그런 것 같습니다. 눈썰미가 좋은 것도 아니면서 포스터만 보고 관심을 안뒀다가 못 본 명작들이 왜이렇게 많은지. 하마터면 '푸르른 날에'도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광주 5.18 항쟁을 재현했다고 했을 때 대체로 가장 먼저 나오는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이미 익히 들어왔고 분노해왔던 일들을 새삼 다시 다룬다고 하면, 문화컨텐츠로서의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 당시 어째서 이런 무자비한 억압이 있었고, 그 일이 왜 아직까지 제대로 보상이 되지 못하는가. 왜 아직도 그 당시의 관련 피해자들은 자살을 하고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는가. 여기에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할 건 그 분노 뒤에 따라오는 냉소입니다. 이런 유형은 아마 저처럼, 저를 포함해서 즉각적으로 화를 내다가 그 자체로 만족하고 다시 잠잠해지는 냄비같은, 사실상 비생산적일 뿐인 유형이겠지요. 뭐 굳이 비하할 건 아니지만 최근 5.18 관련 유족과 유공자들에 대한 기사를 읽자니 "5.18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라고? 재미없을 것 같애"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재에 대해 냉담했던 제가요.  

연극은 광주 항쟁 이후 30여 년이 흐른 뒤부터 시작합니다. 암자에서 스님이 마치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 불공을 드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에게 운화는 '딸'이지만 운화에게 그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야기는 30년 전 광주로 돌아갑니다. 당시 그의 이름은 오민호였고, 윤정혜와 연인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5월 18일 이후 오민호의 삶은 완전히 뒤틀려버립니다. 그 와중에 정혜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자기 인생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민호는 그런 정혜에게 등을 돌리고 불가에 귀의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다시 만난 두 사람.
참 애틋한 이야기인데 대사들은 통속적입니다. 예를 들어 오민호가 30년 전 자신과 정혜의 다정한 모습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지금은 똥배도 나오고 트림도 꺼억꺼억 해대지만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 신파로 흐를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한번씩 '깨는' 대사들이 나오면서 우스웠다가 또 비장했다가. 연출가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 전반에 곳곳이 숨어있는 유머는 어둡고 비장한 분위기를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극의 중심주제를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돌발적 행동이 주는 웃음, 재치있는 대사들은 우리네 일상 혹은 그 당시 광주 사람들의 일상처럼 녹아들어 오히려 비극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극 후반부에서 두 주인공의 청년시절을 맡은 배우 두 명이 초반부의 연애시절(주책맞게 뛰어다니는) 장면을 반복하는데, 초반부에선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던 그 장면이,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반부에선 그렇게 슬픈 몸짓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30년 후의 정혜가 민호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었습니다. 30년 전 자신의 비겁했던 모습과 그로 인해 미쳐버렸던 나날을 민호가 떠올리던 장면이었는데요. 저 멀리 뒤켠에서 정혜가 묻습니다.

"차 맛은 어떤가요."
"차 맛이....씁니다!"

결국 불가에 귀의하고나서도 민호는 여전히 그날의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버린 사랑하는 여인 정혜와도요. 하지만 그와 그녀의 딸인 운화는 이렇게 말하죠.

"차가 차요!"

저는 운화의 존재가 (비록 연극에선 비중이 작았지만) 민호와 정혜의 과거에만 정체되어있던 삶을 앞으로 진전시켜줄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운화의 결혼소식으로 민호가 속세에 나타나고, 정혜는 민호가 결혼식에서 입을 두루마기를 준비합니다. 과거의 고통에만 빠져있던 두 사람을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나날로 끌어내는 역할. 또한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슬픔을 딛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관객의 바람을 지지해주는 역할로서 운화가 있었다고 봅니다.

 

과거와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이 작품은 공간의 활용이 딱딱 갈라져있지 않습니다. 세트나 소품의 완전한 변화 없이도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는데요. 30년 전의 민호와 스님이 된 민호가 동시에 나오기도 하고, 30년 전 정혜와 지금의 정혜가 둘 다 나와서 똑같은 대사를 말하기도 합니다. 30년 전 민호가 스님 민호에게 "얼른 가보세요"라고 등을 떠밀기까지 하는데, 이건 달리 생각해보면 당시 광주 항쟁이 현재와 단절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시종일관 등장하는 '아이'는 다른 배역들과는 달리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뒤섞인 공간과 더불어 '아이'의 미스테리함이 이 연극이 주는 특징인 것 같습니다.

특징이라고 하자니 대사도 떠오르네요. 모든 배역들이 말하는 대사의 톤은 마치 선언문 낭독하듯이 우렁차고 구구절절합니다. 대체 숨쉴 시간이나 있나, 저걸 언제 다 외웠을까싶을 정도로요. 못알아들을 정도의 속도로 대사를 말하는데 신기하게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ps. 도청에 모인 시민군 장면에서 나왔던 핑크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비장한 장면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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