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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ner/Visual road

[연극] 쥐덫

 


쥐덫

장소
대학로 SH 아트홀
출연
장두이, 박경득, 이정성, 홍성수, 임은연
기간
2012.08.02(목) ~ 오픈런
가격
R석 50,000원, S석 35,000원
가격비교예매

연극 <쥐덫>은 영국의 유명한 고전 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쥐덫>을 원작으로, 60년 전 왕실 초청으로 초연된 뒤 지금까지도 영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으로서 이번 라이센스 공연 소식에 무척 설렜다. 특히 이 단편 <쥐덫>은 언제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수작 중 수작이라 기대도 꽤 많이 했다. 오픈런임에도 불구하고 좌석 잡기가 쉽지 않아 여러모로 애를 먹다가 결국 한 달 뒤(!)에 있을 날짜에 예매 성공. 그토록 기다려온 연극인데 이왕이면 좋은 자리에서 봐야하지 않겠나!

그래서 한 달을 꼬박 기다린 뒤 드디어 보게 된 연극 <쥐덫>은...다른 평들을 보면 별로였다는 소감이 많지만 나는 나름대로 괜찮게 봤다. (별로였다는 평들 대부분은 나처럼 이미 원작 소설을 본 사람들이었다) 범인이 누군지도 알고 보는 마당에 스토리의 반전을 기대하지 않았고. 원작엔 없는 인물 '케이스웰'의 존재도 범인이 누군지 안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현대극만 보아왔던 나로선 이런 고전극의 연출이 무척 흥미로웠다.

 

 

인물들의 대사가 원작 소설에 나온 그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렌이 눈이 휘몰아치는 날씨를 두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비유한다든가,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얼굴을 한번 보시죠"라는 대사라든가. 근데 자일즈랑 몰리가 만난 지 몇 주만에 결혼했다는 대사는 왜 안나온 건지...그것도 반전을 위한 중요한 부분인데.
세트는 몽스웰 여관의 라운지 단 하나 뿐이고, 그 안에서 모든 사건이 다 진행된다. 즉 살인사건도, 각 인물들의 미스테리가 드러나는 장면도, 사건 해결도 전부 한 공간에서 나타난다. 이게 당최 가능한 일인가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았고. 트로터 형사의 등장이나 보일 부인의 죽음 역시 고풍스럽게 연출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연출은 초반 첫 살인사건. 이걸 왜 스크린으로 보여줬을까...그냥 어두운 계단을 범인이 휘파람을 불며 올라가서 문을 열고 첫 살인대상을 죽이는 연출만 했어도 충분했을텐데. 무대 구성이 좀 어려웠더라도 스크린은 너무했다. 프로젝터 빔으로 쏜 그 영상이 그렇다고 화질이 좋았던 것도 아니라 더욱 아쉬운 부분.

뭐니뭐니해도 내가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스릴러였다.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만큼의 긴장감을 연극에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원작 <쥐덫>의 묘미는 고립된 장소 안에서 대체 누가 범인인지, 전부에게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서스펜스다. 트릭보다는 범인의 심리상태를 주도면밀하게 추리해서 풀어가야 하는 사건인 것이다. 게다가 반전 요소까지 놓쳐선 안되기 때문에, 후반부에 가기까지 범인은 철저히 자신을 숨겨야 하며 범인이 아닌 사람들은 철저하게 관객들이 자신을 의심하도록 연기해야 한다. 각 인물이 가진 고유의 서스펜스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원작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선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이 부분만큼은 연극이 제대로 완성해주기를 바랐다.

 

탁월한 의심

바로 여기서 연극의 고전적인 묘미가 살아난다. 연극은 대사를 말하고 있는 연기자 이외에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도 관객들이 주목을 한다. 몽스웰 여관에 형사가 올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등장인물들의 반응. 형사에 대해 극도로 경계심을 보이는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범인을 추리하려는 관객들에게 탁월한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꽤 중요한 인물인 메트카프 소령도 연극에선 대사가 딱히 없는 편이지만 행동이나 표정, 그리고 언성으로 그 인물이 가진 서스펜스를 나름대로 잘 구사한 것 같다. 크리스토퍼 렌의 유약한 히스테리나 파라바치니의 의뭉스러운 성격을 표현하는 장면은 좀 아쉬웠지만...몽스웰 여관의 주인인 몰리와 자일즈는 원작 소설의 캐릭터 파악을 잘 한 것 같다.
아까도 말했듯이 원작 <쥐덫>은 어떤 천재 탐정이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관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누구든 범인일 가능성이 있는 서스펜스가 일품인 작품이다. 탐정이 각각 한명씩 만나서 알리바이를 따지고 대질심문을 하는 장면이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각 인물들의 개인적인 행동이나 표정을 단서 삼아 범인을 추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은 관객들에게 여러모로 풍성한 눈요기를 선물한다. 롱리지 농장 사건 얘기가 나왔을 때 보일 부인의 변명을 듣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천천히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쉬운 연기 & 캐릭터 설정

그러니까 연출이나 스토리 등만 보면 이 연극은 고전물로선 무난하게 볼 수 있다. 이 연극에서 어떤 세련미나 현대적인 유머감각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작품 자체가 배경도 전쟁 후기 때문에 이 연극이 원작을 새롭게 각색해서 내놓은 게 아닌 이상ㅡ원작에 충실한 이상, 오히려 고풍스런 재미로 보는 편이 팬들에겐 덜 아쉬울 것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배우들의 연기...등장인물들 자체가 좀 유별스럽고 또 서스펜스를 위해선 캐릭터를 두각시킬 필요가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된 대사 톤이 피로를 가져온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사건 정황이 명확해지고 단서가 드러나는데 이걸 계속 집중해서 듣고 있자면 쉴 틈이 없다. 등장인물 간의 호흡도 어색해서 강렬한 캐릭터들이 따로따로 노는 느낌. 트로터 형사의 연기력도 너무 아쉽다. 대사가 너무 빠르고 단조로워서 다른 배우들과 잘 조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후반부에서 범인이 밝혀졌을 때 그 연기력은...원작소설과 똑같이 했었다면 좀 더 정리되는 느낌이 됐을텐데. 이건 애초에 캐릭터 설정이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크리스토퍼 렌의 캐릭터 설정도 원작과는 조금 동떨어져있다. 애초에 크리스토퍼 렌을 연기한 배우분이 나이 지긋한 분일 줄은 몰랐다(...) 연극에선 이 분이 극의 유머러스를 도맡아 했는데,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크리스토퍼 렌의 불안한 정신상태는 오히려 희극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케이스웰...원작에도 없는 이 인물은 대체 왜 들어간 걸까. 영국 본토의 연극에서도 등장하나본데, 나중에 정체가 드러나도 감동이 느껴질만큼 의미가 있는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케이스웰이 말하는 장면들은 굳이 스토리 진행에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극이 늘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케이스웰과 트로터 형사 둘만 있는 부분은 빼는 게 좋을 것 같다...트로터가 사건 해결이 안돼서 머리를 쥐어뜯고, 케이스웰이 그걸 보며 두려워하는 그 장면은 너무 뻔하게 드러나서 재미가 반감되었다.

 

<쥐덫>을 보고 나오면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중 다른 작품도 연극화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니면 아예 포와로가 나오는 장편을 대작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혹은 <화요일 클럽의 살인>을 옴니버스식으로 연극화한다면 그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 솔직히 <쥐덫>을 연극으로 봤다는 거에 의의를 두고 싶은 거지 원작과 비교해보면 연극이 여러모로 아쉽긴 아쉽다. 아무튼 애거서 크리스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선 <쥐덫>을 연극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영국에선 지금까지도 오픈런이라는 말을 듣고 어찌나 부러웠는지. 오픈런이라고 하니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한번 보러가면 이 아쉬움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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